전쟁의 그늘에 가려진 구림마을 비극의 진실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1) #010
선호성 기자입력 : 2024. 05. 24(금) 17:08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1950년 11월경 구림지역에서는 마을유지가 앞장서 주민들에게 일제 자수를 권해 민간인의 희생을 막고자 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영암경찰서에 사소한 부역을 한 사람까지도 자수를 했다. 12월 15일경에는 군서지서가 수복됐고 구림지역 치안은 확보돼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1951년 1월 2일 군서지서로 호출되거나 연행된 동구림리·도갑리 주민 12명이 신기현(당시 육군 소속)과 군서지서 경찰에게 사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신기현(申奇鉉)은 영암중학교 2학년 재학 중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이후 인민군 점령기에 군서면 송평리 신정마을에 거주하던 신기현의 아버지가 간척지 농업과 관련해 신기현의 모친과 함께 좌익에게 살해되고 소를 빼앗겼다.1)
이 사실을 알게 된 신기현은 1950년 12월 30일경 군서지서 경찰과 함께 인민군 점령기에 분주소원을 하였던 최○○·조○○을 임시 지서인 학암창고로 불러 사흘간 고문했다. 신기현과 경찰은 최○○·조○○을 취조하면서 구림지역 부역혐의자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51년 1월 2일 아침 12명의 주민이 군서지서로 호출됐다.
최재림과 최길만은 지서를 짓는 울력을 하다 잡혀갔다. 이문덕과 박기봉은 경찰의 지시에 따라 야경을 서고 마을회관에서 늦잠을 자고 있다가 지서로 오라는 전갈을 받고 임시 지서인 학암창고로 갔다.
한편 당시 소방대원이었던 최재욱(당시 20세)은 1951년 1월 2일 영암경찰서로 쌀을 운송하라는 군서지서의 명령을 받고 수행 경찰 1명과 군 트럭에 올랐다.2) 이 트럭은 신기현이 군부대에서 가져온 것으로 트럭에는 신기현을 비롯해 군서지서 경찰과 이미 잡혀와 취조를 받고 있던 조○○·최○○, 그리고 그날 아침 군서지서로 호출되었던 주민 12명이 타고 있었다. 트럭은 영암경찰서를 향해 가던 중 호동 잔등을 지나 주암마을 못 미쳐 속칭 ‘배바위’ 옆에 멈췄다. 경찰은 조○○·최○○를 제외한 12명에게 팔을 머리 위에 깍지 끼게 한 뒤 한 명씩 끌어내어 사살했다. 현장을 목격했던 소방대원 최재욱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도로 옆에 길을 내려고 파놓은 자리가 있었는데 거기에 잡아온 사람들을 한 사람씩 세워 탕 하고 쏘았다. 다른 사람들은 기가 죽어 있었는데 최길만은 성큼성큼 걸어가니까 ‘저놈 도망간다’면서 먼저 쏴 버렸다. 죽정마을 박삼규3)는 동생이 군인이라고 살려달라고 사정했지만 쏘아버렸다. 최옥남(여·당시 20세)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그대로 쏘았다.”
12명을 사살하고 난 뒤 신기현은 다시 트럭에 올라 최재욱 일행과 영암경찰서로 갔고 군서지서 경찰과 최○○·조○○4)은 걸어서 군서지서로 돌아갔다.
신청인·참고인에 의하면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인민군 점령기에 신기현의 부모가 살해된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고 일부는 부역사실이 있었으나 자수를 한 상태였다. 또한 일부는 가족 중에 입산자가 있거나 부역혐의 등으로 경찰에게 희생된 상태였다. 즉, 최재림(당시 44세)은 힘이 장사여서 소를 다룰 줄 알았는데 신기현 아버지 소유의 소를 잡을 때 ‘코뚜레’를 잡은 적이 있었다.5) 이문덕(당시 38세)은 ‘사감에 의한 모략’으로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살해된 사람 중 박현규(당시 34세)는 인민군 점령기에 군서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하였고 자수한 뒤 집에 있었다. 최재환(당시 38세)은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에 협조한 적이 있었다. 최길만(당시 32세)은 보도연맹원이었다. 최석호(당시 20세)는 목포사범학교 학생으로 학생 간부를 하면서 좌익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최옥남(여·당시 20세)은 인민군 점령기에 여성동맹위원이었다.6) 박기봉(당시 28세)은 일본에 다녀온 젊은이로 똑똑했고 면 활동을 했다.7)
박옥재(당시 37세)는 아들 박석렬(당시 19세)이 전쟁 이전에 연락 등 좌익의 심부름을 해주다 군서지서로 끌려가 고문 끝에 사망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박옥재는 마을에 경찰이 나타나면 ‘징’을 쳐서 주민들에게 알려주고 쌀 걷는 심부름을 했다. 최재화(당시 19세·부르던 이름 최삼규)는 최월규·최태규의 동생이다. 최월규는 전쟁 전 빨치산으로 경찰에게 붙잡혀 즉결처형되었고 최태규는 국방경비대에 입대,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전쟁이 나자 ○○○으로 활동하다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최규환(당시 23세)은 최규택·최규봉의 동생이다. 최규택은 전쟁 전에 부역혐의자로 도피하던 중 경찰에게 잡혀 죽었고 최규봉은 전쟁 전 부역혐의로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전쟁이 나자 인민군이 문을 열어주어 나간 뒤 행방불명됐다.8) 박수임(여·당시 50세)은 장남 박민재가 보도연맹에 가입, 1950년 7월 22일 살해된 일이 있었다.
이 사건 희생자 중 최재림의 시신을 목격한 최철종(당시 22세·최재림의 아들)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지서에서 치안보조원을 하고 있었는데 군인이 지서에 와서 두 사람을 데려다 취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51년 1월 2일 순찰을 돌면서 호동에서 군 트럭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군인이 돌아가나 보다 했다. 조금 후 총소리가 났는데 공포탄과는 달라 ‘사람이 죽었구나’ 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주암 잔등 근처 굴창에 사람이 여럿 죽어 난장판인데 두루마기를 입고 몸부림치다 죽은 듯한 박현규의 시신과 우리 아버지 시신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전에 작두질을 하다 손가락이 잘린 적이 있는데 잘린 손가락이 있는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고 나는 기가 딱 막혀서 미친 사람마냥 넋이 나갔다.”
이 사건은 경찰이 신기현과 더불어 부역혐의자 명단을 작성한 후 이들을 의도적으로 살해한 사건으로 판단된다.9) 가해자로 지목된 신기현은 육군 소위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10) 사살현장에 있었던 군서지서 경찰 중 1명은 김봉석으로 확인됐다.11)
이 사건의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최재림 등 12명이다.
다음에 계속
1) 참고인 ○○○ 통화보고서(2008.10.27.). “이웃에 신상훈(신기현의 부친)이라는 분이 저수지에서 물관수를하셨는데 심하게 해서 인심을 잃었다. 좌익 쪽에서 집에 불을 지르고 신상훈을 죽이고 부인도 데려가 죽여버렸다.”; 참고인 최철종 진술 녹취(2008.4.23.); 참고인 박장재 진술조서(2008.); 참고인 박찬원 진술조서(2008.5.23.).
2) 참고인 최재욱 진술조서(2008.3.13.). “군인 장교 1명이 군용차를 갖고 와서 그 차를 타고 쌀을 운송하기로 했다. 나보고 절대 차에서 내리지 말라고 했다. 차를 타보니 앞에는 군인이 데리고 온 운전사와 앉았고 뒤에는 여러 사람이 고개 숙이고 앉아 있었고 경찰도 4∼5명 있었다.”
3) 사건번호 다-8608호에는 13명이 희생되었다고 신청되었으나 진실규명대상자 중 박삼규의 신원을 파악할수 없어 이번 보고서에 포함하지 않고 이를 다-8608(1)로 분리하여 보류하였다. 죽정마을 최재화의 부르던 이름은 최삼규였다. 최재화의 형 최태규가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는데 최삼규를 박삼규로 혼동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4) 참고인 최○○ 진술녹취(2008.4.23.). “최○○와 조○○은 200만 원 보상을 해주어 풀어주었다는 소문이 있다.”
5) 참고인 최철종 진술녹취(2008.4.23.). “아버지가 힘이 장사여서 코뚜레를 잡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소가 신기현네 소였다.”; 참고인 박찬원 진술조서(2008.5.23.); 참고인 최길호 진술조서(2008.3.13.); 참고인 최정식 진술조서(2008.5.21.). 제적부에 “1951년 1월 2일 오전 10시 사망”으로 정확하게 사건발생 일시가 기록됐다.
6) 참고인 박○○ 진술조서(2008.4.21.). “최석호, 최옥남 등은 활동경력은 있었지만 이미 자수를 하고 피신을 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 참고인 박○○ 진술조서(2008.5.23.).
7) 참고인 박○○ 진술조서(2008.5.22.);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2008.6.12.);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2008.6.11.); ○○○ 통화보고서(2008.6.12.). “군산으로 피신해 있던 형(박기봉)을 입산한 것으로 안 경찰이 형수 전 씨(음기 출신)를 살해하였다.”
8) 참고인 ○○ 진술조서(2008.3.13.); 참고인 박○○ 진술조서(2008.5.23.); 참고인 ○○○ 진술녹취(2008.4.23.). “죽정의 최규환은 나와는 동창으로 형이 유격대였는데 최규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형의 일로 죽게된 것 같다.”
9) 참고인 ○○○ 진술녹취(2008.4.23.). “자수한 부역자를 법으로 다룰 수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처형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10) 참고인 ○○○ 통화보고서(2008.10.27.). “이웃인 신상훈(송평리 862번지 신정마을)의 외아들 신기현(당시 25세) 소위가 고향에 돌아와 부모를 죽인 사람들(군서면 평리, 도갑리 등)을 싹 잡아다가 하루저녁에 죽여버렸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와 며칠 있었는데 소문에는 전쟁 때라 전시 탈영으로 어떻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론 마을에 안 나타났다. 신기현 부인의 친정(정읍)에 가서 산다고 들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주민조회 결과 회신(2008.11.5.)을 통해 얻은 추정자 2명의 제적부를 필동사무소에 의뢰해 참고인 진술과 대조하였으나 특정할 수 없었다.
11) 영암경찰서 회신자료(2008.11.22.) 경찰공무원 경력증명서 에 의하면 김봉석은 영암경찰서 소속으로 전쟁기간 중 군서지서에 근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참고인 최○○ 진술조서(2008.3.13.); 참고인 박○○ 진술조서(2008.4.21.), 통화보고서(2008.10.21.). “그날 동행한 군서지서 경찰은 고산리 조씨 집안의 사위 김봉석과 지아목 주막집 김성순의 사위(성명미상)라고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