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고의 발명품, 백신

백신의 발명으로 인류는 각종 감염병을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이 덕분에 다수의 사람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됐고 나아가 과학적인 집단 면역의 구현도 가능해졌다. 그 예로 미국의 경우 1921년 디프테리아 발병이 1년에 20만 6939회로 최고조를 찍었으나 1998년에는 1년에 단 1회로 확 줄어버렸으며, 뇌수막염은 백신이 개발되면서 발병 빈도가 유럽에선 90%, 미국에선 99%나 줄었다. 또한 소아마비 역시 엄청난 수가 줄었는데, 1988년도엔 35만 명이었던 소아마비 감염자가 2015년엔 74명으로 감소됐다. 즉, 백신이 수많은 사람을 장애와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준 것이다. 심지어는 변이가 잦은 SARS-Cov-2(코로나 바이러스)를 상대로 한 백신 역시 돌파감염으로 말썽을 빚음에도 불구하고 중증, 사망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아내는 효능은 막강하다.

백신이 낳은 과학적 집단 면역의 예로는 역시 천연두의 박멸을 들 수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병이 천연두였는데, 그 천연두를 10여 년 만에 인간 사회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이다. 그 증거로 한국에서 1970년 언저리에 태어난 사람의 어깨에는 국화빵 비슷한 작은 흉터가 있는데, 이것이 천연두 백신 접종 반흔(흉터의 일종)이다. 그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전부 이 흉터가 있다. 반면 그로부터 십몇 년 후 태어난 이들은 아무도 이런 반흔이 없는데, 병을 사회로부터 완전히 몰아내서 더는 백신 접종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백신 공리주의에 갇힌 의학

이러한 백신의 효능으로 인해 의학에서는 백신의 영역에 관한 한 공리주의적 관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매우 낮은 확률의 중증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으나, 백신 접종 시의 이득이 손해보다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을 알기에 이를 대부분 받아들인다.

백신을 맞고 중증 후유증에 시달렸거나 시달리고 있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제약사와 의료계, 그리고 정부 등에 “백신 접종 후 중증 부작용 확률이 아무리 극도로 낮다고 해도, 내가 거기에 걸리면 내 경우에는 그 확률이 100% 아닌가? 제약사, 의학계, 정부 말을 믿고 접종받았는데, 부작용을 겪고, ‘인과성 없음’을 이유로 적절한 보상도 받지 못하면 앞으로 누가 백신을 맞으려 하겠나?”라는 항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의학에서는 백신과 부작용 간의 인과 관계를 섣불리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섣불리 인정할 경우, 추후 ‘인과성 없음’이 연구 결과로 확정돼도 섣부른 인정으로 인한 학계의 신뢰도 손상은 물론 그로 인한 사후판단 편향의 확산과 더 나아가 백신 반대 운동의 확대 등 보상 시의 이득보다 손해가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백신 산업의 붕괴로 이어져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즉 이득은 한없이 0에 수렴하는데 손해는 한없이 무한대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의학계에서는 백신과 부작용 간의 인과 관계에 관해 과학적 회의주의를 적극적으로 채택하며, 임상 결과에서의 일관성 부족 등을 이유로 증거가 불충분하면 백신-부작용 간 인과성 가설을 기각한다. 순수과학적 측면의 의학에서, 사람의 죽음은 통계의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의학이 깔고 있는 공리주의에서 사람 목숨을 숫자로만 취급하는 관점 그 자체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문제는 이른바 ‘소수의 식별 가능한 생명 대 다수의 통계적 생명의 문제’(Identifiable vs. Statistical Lives)라고 해서 오랜 시간 동안 토론과 논의가 이어졌지만,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이 문제는 의학뿐만 아니라 사회공학 등 학제적 접근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다시 말해 ‘백신 피해’라는 하나의 관계가 아닌, 환경적 요인이나 기저질환 등 여러 연관성을 따져봐야 하는 문제로 귀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악마의 증명, 인과성과 상관성의 혼동

일본은 1980년대까지 수두와 일본뇌염, 백일해의 백신기술을 미국에 공여하던 백신 강국이었다. 1975~1989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160개의 신약을 개발한 제약 강국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사법부의 한 판결 이후 백신 분야에서의 강국의 지위는 내리막을 걷게 됐다.

1992년 12월 18일 일본의 도쿄고등법원은 1952~1974년 인플루엔자, 홍역, 볼거리 등의 백신을 접종한 자녀가 부작용으로 장애를 입거나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부모와 가족 160명이 제기한 집단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을 명령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피해자 구제의 길을 열어준 획기적인 판결”이라는 여론에 밀려 상고를 포기했다. 문제는 그다음으로, 해당 판결 이후 일본은 백신 의무접종을 폐지했다. 이후 일본 내에서의 백신의 수요는 급감하게 됐고 제약사들은 일제히 백신 사업에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후 다른 계기들도 함께 작용하기도 했지만 일본 법원의 판결은 일본의 자국산 백신 개발 능력을 불구로 만드는 그 시발점이 됐다. 이를 두고 일본의 전문가들은 “일본이 백신 선진국 자리를 스스로 반납한 것”이라고 평가했고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과학적 근거가 인정되지 않은 현상까지도 부작용으로 인정한 판결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당시 일본 법원이 각 관계를 분리해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따지고, 일본 정부 역시 백신 접종 의무화는 유지하되 판결을 참고해 보상안을 마련했다면 일련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고 봤다. 하지만 일본 법원이 선후관계를 명확하게 따지지 않은 채 무작정 피해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일본 정부 역시 여론에 떠밀려 ‘백신 의무 접종 폐지’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결국 백신과 관련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악마의 증명에 빠진 일본의 백신 산업은 크게 쇠퇴하고 말았으며, 해당 사건에서 법원과 정부가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렇듯 관계의 불명확한 분할과 선후관계의 혼동은 산업 전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비단 백신 산업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 나아가 사회 전반에 공통으로 적용된다 할 것이다.

과도하게 인과성을 인정하는 것도 안 좋지만, 피해자에게 무작정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행위 역시 백신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또 자칫 인신공격의 오류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책임 소지를 정확하게 파악해 합당한 손해배상 및 보상 체계를 마련하고, 나아가 해당 피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 지침 정비도 소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백신 관련 피해가 확실히 소수이긴 하지만 절대 0은 아니기에, 그 소수를 다수결로 묻는 행위로는 결코 백신 관련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