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의 예술, 월출산에서 꽃피우다”
장인의 혜안과 셰프들의 창의가 만난 2일간의 여정
선호성 기자입력 : 2024. 12. 27(금) 12:17

▲ 김명성 참발효연구소장이 셰프들을 대상으로 전통 식초 발효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스텐레스와 돌을 제외한 모든 재료로 식초를 만들어봤습니다.”
지난 15일, 영암 월출산 자락의 김명성 발효연구소. 한 자리에 모인 30여 명의 최정상급 셰프들은 일제히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출연진부터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오너들까지,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찾아온 셰프까지. 이들을 이곳으로 이끈 것은 바로 발효의 새로운 지평이었다.
자연이 가르쳐준 발효의 비밀
“농장과일은 불안정한 자가면역체계로 부패 위험성이 높지만, 야생과일은 안정적인 자가면역체계로 발효식초 성공률이 높습니다.”
탁한 색의 두껍고 거친 껍질, 작은 크기로 상품성이 떨어지는 야생과일. 그러나 자연발효 과정에서는 오히려 이 ‘결점’들이 장점이 된다. 외부 환경 변화에 대한 대항력이 뛰어나 90%의 높은 성공률을 보이기 때문이다.
발효의 또 다른 특징은 순수하게 과일 자체의 미생물만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스트나 모균, 누룩 같은 외부 발효제를 일절 첨가하지 않는다. 대신 18브릭스를 기준점으로 한 정교한 당도 관리가 이뤄진다. 일반적인 발효액이 50%에 달하는 높은 설탕 함량을 보이는 것과 달리, 2~5%의 낮은 설탕 비율로도 성공적인 발효가 가능하다.
월출산이 키운 발효의 예술
발효 과정에서는 온도 관리가 핵심이다. “낮은 기온에서는 단당수의 먹이 활동이 원활하지 않아 알코올 발효와 초산발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김 소장은 최적의 발효 조건을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거쳤다.
발효 30일 후부터는 원물의 상태에 따라 선택적으로 분리작업을 진행한다. 이후 호기성 상태 유지를 위해 천으로 입구를 막아두는데, 이때 형성되는 겔(gel) 현상은 발효의 진행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완성된 식초는 보통 10개월 이상의 발효 기간을 거친다. “완성된 식초는 맑은 용액이 되며, 온화한 향이 특징입니다. 특히 여름철 32~33도의 기온에서 최종 발효를 마무리하면 식품공전 기준인 4~20%의 총산 기준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드레스덴 그린의 박가람 셰프는 이미 전라 백운단 돌배와 제주 난향차로 만든 식전 발효차, 버섯을 넣어 발효한 콤부차를 선보이고 있다. “앞으로는 국내 농부님들이 새롭게 시도하시는 작물들과 명인님의 노하우가 만난다면, 이탈리아 주스티 가문처럼 세계적인 식초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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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성 발효연구소장이 셰프들에게 직접 담근 전통 식초를 설명하고 있다. |
실험실이 된 주방들
레스토랑 본연의 배경준 셰프는 우드파이어와 발효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우드파이어를 이용해 한식 식재료를 새롭게 해석하는 레스토랑입니다. 여기에 전통 발효를 접목하되, 고추장의 자극적인 매운맛, 된장과 청국장의 강한 향, 간장의 날카로운 짠맛을 과학적이고 섬세한 방향으로 재해석하려고 해요.”
본앤브레드의 민경환 셰프는 재래된장의 가능성을 다시 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은 재래된장의 강한 특유의 향 때문에 일본 미소를 사용해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명인님의 깨끗한 풍미를 가진 장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습니다.”
뉴욕에서 미슐랭 3스타를 받은 안진호 셰프는 한식과 양식의 새로운 만남을 꿈꾼다. “10년 넘게 해외에서 활동하며 늘 우리의 발효문화가 궁금했어요. 이제는 양식을 전공한 한국인 셰프로서 이 전통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할지 실험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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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에 참석한 셰프가 김명성 참발효연구소장이 담근 전통 식초의 향과 특성을 살펴보고 있다. |
세계를 향한 새로운 도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이유를 찾고 알아야 합니다.” 김 소장의 이 말은 참가한 셰프들의 마음을 울렸다. 레귬의 성시우 셰프는 “몸이 기억하는 지혜와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만나야 새로운 가치가 창조된다”며 이번 교육의 의미를 정리했다.
2일간의 교육은 끝났지만, 영암에서 시작된 실험은 이제 막 시작이다. 이곳 월출산 자락의 작은 연구소가 세계적인 셰프들이 찾아오는 발효문화의 성지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셰프들은 이곳에서 배운 것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발전시키며, 새로운 한식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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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성 참발효연구소의 장독대에 전통 발효식품을 담은 항아리들이 늘어서 있다. |
에필로그
월출산의 새로운 발효 르네상스를 기대하며
지역기자로서 수많은 취재 현장을 다녔지만, 이번 김명성 발효연구소 취재는 특별했다. 전통의 계승과 혁신이라는,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가치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최근 유네스코 등재로 더욱 주목받게 된 우리의 장 문화. 그러나 김명성 소장은 이 소식에 들뜨지 않았다. “더 확신을 가지고 자존감 높게 일할 수 있게 된 것, 거기까지”라는 그의 담담한 소회는 오히려 깊은 울림을 준다.
한 달여간의 취재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이곳이 단순한 전통 장류 제조장이 아닌 실험실이자 교육장이라는 점이다. 덕진초등학교 학생들부터 세계적인 셰프들까지, 이곳에서는 세대와 국경을 넘어선 배움이 이뤄지고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발효에 대한 그의 철학이다. “발효는 이유 없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처럼, 모든 과정에 과학적 근거와 설명이 뒷받침됐다. 전통의 지혜와 현대 과학의 만남이 만들어낸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월출산 자락의 작은 연구소에서 시작된 이 도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전통 장류의 세계화를 넘어, 한국 발효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이들의 여정을 앞으로도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을 약속한다.
취재에 흔쾌히 협조해주신 김명성 소장님과 연구소 관계자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셰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들이 만들어 갈 영암의 새로운 발효 르네상스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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