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미래를 찾아 월출산을 찾다★
유네스코 등재 후 첫 전문가 교육현장을 가다
선호성 기자입력 : 2024. 12. 20(금) 12:00

▲ 김명성 발효연구소 소장이 메주를 들어 보이며 최적의 발효 조건과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좋은 메주는 32도의 온도와 45%의 습도에서 하얀 곰팡이만 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의 비밀을 찾아서
겨울 월출산이 품은 ‘장(醬)의 과학’
“발효는 이유 없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과정과 과정 사이에 반드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15일, 영암 월출산 자락의 김명성 발효연구소. 한겨울 추위를 뚫고 전국의 유명 셰프들이 이곳에 모였다.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후 처음으로 이뤄진 대규모 전문가 교육현장이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셰프들을 비롯해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오너들까지, 30여 명의 최정상급 요리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찾아온 참가자도 있었다. 이들을 이곳으로 이끈 것은 바로 ‘장(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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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성 발효연구소에서 ‘흑백요리사’ 출연진과 미슐랭 스타 셰프 등 30여 명의 최정상급 요리사들을 대상으로 겨울철 장 담그기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
누가 왔나?
한식 세계화의 새로운 주역 ‘난로회’
이번 교육을 기획한 것은 ‘난로회(煖爐會)’다. 2022년 2월 출범한 이 모임은 불과 2년 만에 한국 F&B업계를 대표하는 300여 명의 전문가 그룹으로 성장했다.
최정윤 난로회 이사장은 “선생님의 장은 서양 테크닉과 특히 잘 어울리고, 생으로 썼을 때 장점이 더 잘 발현된다”며 “셰프들이 자신의 요리에 맞는 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순한 사교모임이 아니다. 100년 가는 식당의 비결부터 브랜드 마케팅 방법까지, 한식의 세계화를 위한 실질적인 연구와 토론이 이어진다.
왜 하필 겨울인가?
전통 장의 비밀을 푸는 열쇠
김명성 소장은 장 담그기의 모든 과정을 과학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겨울철 장 담그기가 선호되는 이유가 주목받았다. 11월부터 4월까지는 식중독균인 노로바이러스가 활발한 시기지만, 오히려 이 시기의 낮은 기온이 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발효균의 성장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름에 메주를 쓰면 수분이 과하게 증발하면서 메주가 제대로 발효되지 않고 그냥 말라버립니다. 반면 겨울철의 낮은 기온과 건조한 날씨는 메주 발효에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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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에 참석한 셰프들이 메주 실습장에서 전통 방식의 메주 만들기를 실습하고 있다. |
이렇게 만든다
메주 만들기의 과학
메주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온도와 습도 관리다. “32도의 온도와 45%의 습도, 이 두 가지 조건이 핵심입니다.” 김 소장의 설명이다.
메주를 만들 때는 수분 조절이 핵심이다. 콩을 삶을 때부터 시작되는 수분 관리는 메주의 성패를 가른다.
특히 메주 표면에 검은 곰팡이가 피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좋은 메주는 겉면에 하얀 곰팡이만 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익한 발효균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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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성 발효연구소 소장이 최적의 메주 제작을 위한 콩 뜸들이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콩의 수분 조절이 메주 발효의 성패를 가른다고 강조했다. |
항아리도 숨을 쉰다
옹기와 함께 숨 쉬는 장
발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옹기다. 김 소장은 정희창 도예가와 협업하며 최적의 발효 용기를 연구하고 있다. “1200도의 고온에서 구워낸 옹기는 숨을 쉽니다. 밖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안의 습기를 선택적으로 내보내는 신비한 그릇입니다.”
일반 항아리나 현대식 용기와는 달리, 전통 옹기는 발효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름과 겨울을 모두 견뎌내야 하는 장독은 옹기여야만 합니다. 다른 재질은 여름에는 끓어버리고 겨울에는 얼어버립니다.”
비법은 네 가지 콩
‘사두장’으로 완성하는 깊은 맛
김 소장이 개발한 ‘사두장(四豆醬)’은 네 가지 콩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대두콩, 청태, 서리태, 서목태를 정교한 비율로 배합한다. ‘겉파랭이’라 부르는 청태는 구하기 어렵지만 고소함이 뛰어나고, 각각의 콩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 어우러져 깊은 맛을 만들어낸다.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사계절 발효 체계다. 봄에는 장 항아리 관리와 장 가르기를, 여름에는 장마철 습도 관리를, 가을에는 18개월 숙성된 장의 입항을, 겨울에는 메주 만들기와 장 담그기를 진행한다. 계절의 변화에 맞춰 장을 관리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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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성 발효연구소 소장이 메주 제작을 위한 콩 분쇄 과정을 시연하고 있다. |
해외파 셰프가 말한다
현장의 목소리
“아메리칸 프렌치를 전공하고 10년 넘게 해외에서 활동했지만, 우리의 장 문화는 늘 궁금했습니다.”
뉴욕에서 미슐랭 3스타를 받은 안진호 셰프는 이번 교육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다. “한식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지금, 양식을 전공한 한국인 셰프로서 이런 전통을 어떻게 접목시킬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강원도가 고향인 그는 전라도 방문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월출산의 웅장함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우리 장 문화의 과학적인 면을 배운 게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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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미슐랭 3스타 출신 안진호 셰프가 김명성 발효연구소의 장(醬) 교육 현장에 참석했다. |
앞으로의 10년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
김명성 발효연구소의 도전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다. 공장식 대량 생산과 전통 장독대 문화의 가치를 함께 고민하며, 각각의 장단점을 연구한다. “전통의 가치를 지키되, 현대적 관리 시스템을 결합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장 문화의 미래입니다.”
“앞으로의 10년 후에도 이 프로그램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라는 김 소장의 말에서 전통 발효문화 계승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월출산 자락에서 시작된 작은 도전이 이제는 한식의 세계화를 이끄는 큰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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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성발효연구소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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