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가 갈라놓은 삶과 죽음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5) #09
이민정 기자입력 : 2026. 09. 04(금) 10:37

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진실규명대상자 최○호(2다-4823, 신청인 최○종)
진실규명대상자 최○호(崔○鎬, 남, 1911년생, 농사, 이장)는 1951. 6. 24.(음력 5. 20.) 영암면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구체적인 희생 경위가 확인되지 않아 진실규명불능 결정되었다.1)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는 대표신청인이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이번 진실화해위원회에는 진실규명대상자 최○호의 아들 최○종이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진실규명신청서, 제적등본 및 족보를 통해 진실규명대상자 및 유족의 신원이 확인되었고, 최○호가 경찰에게 연행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사건 발생 당시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참고인의 진술을 통해 사건의 경위가 확인되었다.
신청인 및 참고인 진술 등을 통해 확인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청인 최○종(1947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최○호는 군서면 서구림리 358번지 남송정마을에서 어머니, 부인, 자녀들과 거주하였다. 1951. 6. 19.(음력 5. 15.) 최○호는 집에 찾아온 서호지서 경찰 2명에 의해 서호지서로 끌려갔다가 다시 영암경찰서로 끌려갔다. 최○호의 가족들은 평소 친분이 있던 군서지서 경찰에게 최○호의 행방을 물어보았고, 며칠 후 군서지서 경찰은 1951. 6. 24.(음력 5. 20.) 최○호가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최○호 아버지의 제삿날이 음력 5. 20.이어서,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낼 수 없어 최○호의 제사는 끌려간 날인 음력 5. 15.에 지냈다.
참고인 최○○(1934년생, 딸)의 진술에 따르면, 1951. 6. 19.(음력 5. 15.) 최○호의 집에 찾아온 경찰 2명이 이야기를 하자면서 최○호를 데리고 나갔고, 최○호의 부인에게 점심을 차려달라고 하였다. 최○호의 부인이 점심을 준비하여 남송정마을에 있는 정자로 가져다주었고, 최○호와 경찰 2명은 점심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는 경찰이 최○호를 서호지서로 끌고 갔고, 그 모습을 참고인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지켜보았다.
최○호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최○호의 어머니는 최○호를 찾으러 다니다가 마을주민으로부터 최○호가 서호지서 쪽으로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다. 다음날 아침, 최○호의 어머니가 서호지서로 갔더니 최○호가 경찰에게 붙잡혀 트럭에 태워지고 있었다. 그 트럭이 영암경찰서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된 최○호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와 소식을 전했고, 최○호의 부인이 돈을 마련하여 군서지서 경찰에게 주며 최○호의 행방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였다.
며칠 후, 군서지서 경찰이 최○호의 부인에게 돈을 돌려주며 최○호가 1951. 6. 24.(음력 5. 20.) 새벽 4시에 영암경찰서에서 끌려 나가 희생되었는데, 희생된 장소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최○호의 부인은 친정인 영암면 송평리 평장마을로 가서 소식을 전했고, 친정 가족들이 영암경찰서 부근을 포함하여 영암 면 소재지를 다니며 최○호의 시신을 찾아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나중에 최○호의 아들(신청인)이 성인이 된 후에 남송정마을에 최○호의 가묘를 만들었다.
참고인 최○○(1930년생, 이웃)의 진술에 따르면, 최○호가 ‘밤손님’과 연락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끌려가 희생되었다.
최○호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50. 12. 9. 본적지에서 사망(1961. 10. 31. 신고)’으로, 족보에는 ‘1951년 신묘(辛卯) 5월 16일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
덕진면 희생 사건
덕진면은 서쪽으로는 영암면과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금정면과 접해 있는데, 금정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해발 약 300m 높이의 산을 넘어가야 한다. 금정면은 인민군 점령기 때 활동했던 인민군, 지방좌익 등의 주요 탈출로 및 은신처가 되었는데, 특히 금정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 위치해 있는 덕진면 영보리와 노송리는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와 활동하고, 낮에는 경찰이 진주하는 지역이 되었다. 주민들은 빨치산의 요구에 따라 먹을 것을 제공하는 등 협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이유로 덕진면은 금정면과 함께 경찰의 빨치산 토벌작전 대상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덕진면 주민들이 피해를 입거나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덕진면 주민 중에는 마을을 떠나 금정면 등으로 피신하여 지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던 중 금정면에 토벌작전을 나온 경찰에 의해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덕진면 주민들은 1951년 봄이 되어서야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실규명대상자 최○암(2다-1635-20, 신청인 최○천)
진실규명대상자 최○암(崔○巖, 족보명 최○열, 남, 1920년생, 초등학교 교감)은 1949. 10. 24.(음력 9. 3.)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최○천(1943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최○암은 덕진면에 있던 영보초등학교 교감이었다. 본적지는 군서면 서구림리 461번지였으나, 1947년경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로 이주하여, 아버지, 어머니, 부인, 자녀들과 함께 거주하였다.
1949. 10. 24.(음력 9. 3.) 저녁, 최○암은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 주민 최○○의 집에 갔다가 빨치산을 만났다. 그곳에 빨치산이 와 있다는 것을 안 경찰이 마을에 와서 최○○의 집을 향해 총을 쐈고, 그 과정에서 최○암이 희생되었다. 이후 경찰은 최○○의 집에 불을 질렀다. 가족들이 최○암의 시신을 수습해서 집으로 가져와 방에 두었는데, 신청인 최○천은 당시 6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방에 있던 까맣게 그을린 아버지 최○암의 시신을 목격한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최○암의 시신은 송외마을 소나무밭 야산에 매장되었고, 현재는 덕진면 영보리에 묘가 있다. 제삿날은 음력 9. 2.이다.
참고인 신○범(1937년생, 최○암의 제자)의 진술에 따르면, 1949년 빨치산이 송내마을 주민의 집에 찾아와 함께 활동하자는 권유를 하였는데, 빨치산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경찰이 송내마을에 왔다. 경찰이 오자 빨치산은 도망갔고, 그 집에 있던 최○암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희생되었다. 참고인은 자신이 영보초등학교 5학년일 때 담임 교사였던 최○암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최○암의 가족들이 최○암의 시신을 매장하러 갈 때 함께 갔다.
참고인 최○대(1936년생, 이웃)의 진술에 따르면, 영보초등학교 교감이었던 최○암이 경찰에 의해 돌아가셨고, 시신은 수습되었다.
참고인 최○자(1944년생, 이웃)의 진술에 따르면, 참고인의 오빠 최○열이 희생된 무렵인 1949년에 최○천의 아버지가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2)
최○암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49. 9. 1. 덕진면 영보리 159번지에서 사망(1965. 10. 12. 신고)’으로, 족보에는 ‘기(忌) 경인년(庚寅年) 9월 2일’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최○암의 시신이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에서 수습된 점, (2) 최○암의 제삿날이 희생 전날인 음력 9. 2.인 점, (3) 제적등본에 기재된 사망일 1949. 9. 1.이 실제 사망일의 음력 날짜(1949. 9. 3.)과 2일 차이로 근접한 점, (4) 족보에 기재된 사망연도는 1950년이지만 기일이 9. 2.로 실제 제삿날과 동일한 점, (5) 최○암의 시신을 매장하러 갈 때 제자였던 참고인 신○범이 함께 따라갔던 점, (6) 신청인이 불에 타서 까맣게 그을린 아버지 최○암의 시신을 목격한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최○암은 1949. 10. 24.(음력 9. 3.)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에서 빨치산을 잡으러 온 경찰이 쏜 총에 맞아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진실화해위원회, 「영암군 민간인 희생 사건(2)」,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6』, 2010.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최○호의 희생과 관련하여 군서면에 거주하는 참고인 최○○에 대한 진술 조사는 진행되었지만, 최○호의 자녀 등 유족에 대한 진술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조사과정에서 입수한 판결문(1949년형공제98호,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 1949. 6. 14.)에 나오는 최○호(군서면 서구림리 368번지, 당 48년)를 동일인으로 추정하였는데, 판결문의 내용은 ‘최○호는 1949. 2. 4. 남로당 계열 성명불상자로부터 비밀 연락문(連絡文)을 받아 전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4월 선고’이다.
2) 신청인 최○자 진술조서(2023. 4. 18.) 최○자는 2다-16659 사건의 신청인으로, 주민등록상 1945년생이나 실제로는 1944년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