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은 저녁 (2)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5) #05
이민정 기자입력 : 2026. 07. 24(금)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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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진실규명대상자 최○찬(2다-7265, 신청인 최○경)

진실규명대상자 최○찬(崔○瓚, 남, 1890년생, 농사)은 1950. 10. 7.(음력 8. 26.) 군서면 해창리 나루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최○경(1972년생, 손자)의 진술에 따르면, 최○찬은 군서면 동호리 687번지 동호마을에서 부인, 아들 최○○ 등 자녀들과 거주하였다.

최○찬은 아들 최○○의 엉덩이에 난 종양에 바를 약을 사러 시종면 옥야리에 있는 한약방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군서면 해창리 나루터에서 경찰을 만났다. 경찰 중 1명이 갑자기 최○찬에게 총을 쐈고, 최○찬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나루터 부근 도포면 구학리 구정마을에 살던 최○찬의 큰딸 최○○가 누군가로부터 소식을 듣고 나루터에 가서 최○찬의 시신을 확인하고, 행인의 도움을 받아 근처 길가에 시신을 매장하였다. 나중에 군서면 도갑리에 있는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최○찬의 제삿날은 희생 전날인 음력 8. 25.이다.

참고인 최○옥(1950년생, 최○찬의 종조카)의 진술에 따르면, 최○찬은 군서면 동호리에 거주하였고, 한학을 하여 마을 일을 보기도 하였다. 최○찬은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1)

제적등본에는 최○찬이 ‘1950. 8. 26. 본적지에서 사망(1953. 3. 16. 신고)’한 것으로, 족보에는 ‘경인(庚寅) 8월 27일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2)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최○찬의 시신이 군서면 해창리 나루터에서 수습된 점, (2) 최○찬의 제삿날이 희생 전날인 음력 8. 25.인 점, (3) 제적등본에 최○찬의 사망일이 1950. 8. 26.로 기재되어 있는 점, (4) 족보에 기재된 최○찬의 사망일이 1950. 8. 27.로 실제 사망일과 하루 차이인 점, (5) 최○찬의 시신을 수습한 고모(최○찬의 딸) 등 가족으로부터 관련 내용을 전해 들은 신청인 최○경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최○찬은 1950. 10. 7.(음력 8. 26.) 군서면 해창리 나루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군서면 마산리 낙안촌마을 희생 사건

1950. 10. 17.(음력 8. 26.) 군서면 마산리 낙안촌마을에 거주하던 임○홍, 임○태, 김○천 등 3명이 경찰에 의해 낙안촌마을 뒷산에서 희생되었다.

사건 당일 낙안촌마을 주민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목격한 참고인 최○상(1938년생, 군서면 주민)은, “그날 경찰이 군서면 구림리에서 사람들을 총살하고 난 후, 나에게 가방을 메고 따라오라고 해서 하루종일 따라다녔다. 구림에서 모정리를 지나, 동호리, 성양리, 마산리로 갔는데, 마산리 낙안촌마을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12시나 1시 정도였다. 낙안촌마을 마을 뒷산에 완만한 경사가 있는데 경찰이 그곳에 있던 주민 20여 명에게 총을 쏴버렸다.”라고 진술하였다.3)

1기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서에 따르면, 1950. 10. 17. 오전, 영암경찰서 경찰 100여 명은 구림지역에 도착하여 마을을 포위하고 수색하는 과정에서 야경을 서던 주민, 총소리에 놀라 집 밖으로 나왔던 주민, 총소리를 듣고 도망가던 주민, 경찰의 명령으로 한 곳으로 모였던 주민 등을 아무런 절차 없이 사살하였다. 작전을 마친 경찰은 신흥동을 거쳐 모정리, 동호리, 성양리, 낙안촌, 해창리를 경유하여 영암면으로 철수하였다.4)


진실규명대상자 임○홍, 임○태(2다-3263, 신청인 임○만)

진실규명대상자 임○홍(林○洪, 족보명 임○재, 남, 1906년생, 농사, 어업), 임○홍의 아들 임○태(林○太, 남, 1929년생, 농사)는 1950. 10. 17.(음력 9. 7.) 군서면 마산리 낙안촌마을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임○만(1943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임○홍, 임○태는 군서면 마산리 낙안촌마을에 거주하였다. 1950. 10. 17.(음력 9. 7.) 낮, 임○홍은 아들 임○태와 함께 마산리 낙안촌마을 뒷산에서 쉬고 있었고, 그곳에 낙안촌마을 주민 10여 명도 함께 있었다. 그러던 중에 군서면 동구림리와 서구림리에서 작전을 마친 경찰이 마산리 낙안촌마을에 들어왔고, 경찰은 마을 뒷산에 있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집에서 총소리를 들은 임○홍의 부인이 뒷산으로 가보니 임○태는 이마한가운데에 총을 맞은 채 사망해 있었고, 임○홍은 총을 맞고 쓰러졌으나 아직 살아 있는 상태였다.

임○홍의 부인이 집에 가서 물을 떠 와서 임○홍에게 주었고 임○홍은 그 물을 마시고 사망하였는데, 그 모습을 함께 있던 아들 임○만(신청인)이 모두 지켜보았다.

임○홍의 부인과 마을주민들이 임○홍과 임○태의 시신을 수습하여 뒷산에 매장하였다. 두 사람의 제삿날은 음력 9. 6.이다.

제적등본에 임○홍은 ‘1965. 9. 10. 사망’, 임○태는 ‘1952. 3. 3.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족보에 임○홍은 ‘기(忌) 9월 6일’로 기재되어 있고, 임○태는 미혼으로 사망하여 등재되지 않았다.6)

2007년 피해자현황조사에 ‘임○홍(남, 45), 임○태(남, 24), 군서면 마산리, 1950. 10. 16., 낙안촌 마봉, 총살, 경찰’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사건 당일 임○홍과 임○태의 시신을 목격했고, 임○홍이 숨을 거두는 모습을 신청인 임○만이 모두 목격한 점, (2) 진실규명대상자 임○홍과 임○태의 시신이 군서면 마산리 낙안촌마을 뒷산에서 수습된 점, (3) 임○홍과 임○태의 제삿날이 희생 전날인 음력 9. 6.이고, 족보에 임○홍의 기일이 9. 6.로 기재된 점, (4) 경찰의 지시에 따라 경찰과 함께 낙안촌마을에 갔다가 마을주민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목격한 참고인 최○상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5)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1950. 10. 17. 군서면 구림리에서 경찰에 의한 포위작전이 발생한 사실이 확인된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임○홍과 임○태는 군서면 동구림리 등에서 작전을 마치고 마산리에 들어온 경찰에 의해 1950. 10. 17.(음력 9. 7.) 군서면 마산리 낙안촌마을 뒷산에서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신청인 최○옥 진술조서(2023. 3. 20.) 신청인 최○옥은 2다-6311 사건(진실규명대상자 최○린)의 신청인으로, 진실규명대상자 최○찬은 신청인 최○옥의 할아버지 최○린의 형이다.
2) 『탐진최씨진사공파세보(耽津崔氏進士公派世譜)』 3권, 185쪽
3) 신청인 최○상 진술조서(2023. 5. 12.) 최○상은 2다-14140 사건의 신청인이다.
4) 진실화해위원회, 「영암 구림 첫포위 사건」,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03』, 2007, 1011쪽.
5) 제적등본에 사망신고일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6) 『풍천임씨통덕랑공파보(豐川任氏通德郞公派譜)』, 1993,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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