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전하지 못한 밥 (2)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5) #04
이민정 기자입력 : 2026. 07. 10(금)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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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진실규명대상자 황○수(2다-6872, 신청인 황○섭)

훗날 신청인은 영암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마을주민 정○○(고인)로부터 황○수가 영암경찰서에 갇혀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황○수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50. 12. 18. 본적지에서 사망(1957. 12. 4. 신고)’으로, 족보에는 ‘1950년 경인(庚寅) 12월 18일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황○수의 시신이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 뒷산에서 황○수의 부인과 동생에 의해 수습된 점, (2) 영암경찰서에 감금된 황○수에게 밥을 가져다주고, 이후 황○수의 시신을 직접 수습한 어머니로부터 관련 내용을 전해 들은 신청인 황○섭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3) 제적등본과 족보에 황○수의 사망일이 1950. 12. 18.로 기재된 점, (4) 황○수의 제삿날이 끌려간 날 전날인 음력 12. 16.인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황○수는 영암경찰서에 끌려가 감금되었다가 1951. 1. 25.(음력 1950. 12. 18.)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진실규명대상자 정○채(2다-7350, 신청인 이○임)

진실규명대상자 정○채(鄭○采, 남, 1898년생, 농사)는 영암경찰서에 끌려가 감금되었다가 1951. 1. 25.(음력 1950. 12. 18.)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이○임(1941년생, 며느리)의 진술에 따르면, 정○채는 영암면 용흥리 429번지 새실마을에서 부인, 자녀들과 함께 거주하였다. 정○채의 집이 부유한 편이어서 빨치산이 정○채의 집에 찾아와 음식을 가져가는 일이 잦았는데, 정○채는 빨치산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영암경찰서로 끌려가 감금되었다. 정○채는 감금되어 있던 사람들과 함께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 산골짜기에서 총살되었다. 정○채의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였다. 제삿날은 음력 12. 17.이다. 신청인은 결혼 후 시어머니와 함께 시아버지 정○채의 제사를 지내면서 관련 내용을 전해 들었다.1)

정○채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50. 1. 20. 본적지에서 사망(1962. 12. 1. 신고)’으로, 족보에는 ‘경인(庚寅) 12월 18일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정○채의 시신이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 뒷산 산골짜기에서 가족들에 의해 수습된 점, (2) 정○채의 제삿날이 희생 전날인 음력 12. 17.이고, 족보에 정○채의 사망일이 1950. 12. 18.로 기재된 점, (3) 제적등본에 기재된 사망연도는 1년 차이가 나지만 사망일자는 실제 사망일(1951. 1. 25.)과 근접한 1. 20.인 점, (4) 시어머니(정○채의 부인)와 함께 정○채의 제사를 지내며 정○채가 희생된 일에 대해 전해 들은 신청인 이○임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정○채는 영암경찰서에 감금되었다가 1951. 1. 25.(음력 1950. 12. 18.) 군서면 호동리 월곡마을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진실규명대상자 이○태(2다-178, 신청인 이○용)

진실규명대상자 이○태(李○泰, 남, 1919년생, 농사)는 영암경찰서에 끌려가 감금되었다가 1951. 1. 25.(음력 1950. 12. 18.)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이○용(1941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태는 신북면 유곡리 177번지 닭실마을에서 어머니, 부인, 자녀들과 거주하였다. 이○태는 같은 마을에 살던 빨치산이 자신을 입산시키려고 집에 찾아오곤 하자, 밤마다 대밭에 숨어 지냈다.

1951. 1. 어느 날, 이○태는 마을주민들과 함께 불에 탄 신북지서를 복구하러 갔다가, 마을주민 두세 명과 함께 경찰에 의해 영암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은 이○태 등이 좌익활동을 했는지 알아본다며 끌고 가서 영암경찰서에 감금시켰다. 마을주민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이○태의 부인이 밥을 싸서 영암경찰서로 매일 면회를 갔다. 며칠 후, 이○태의 부인이 이○태가 풀려난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밥과 새 옷을 가지고 영암경찰서로 갔으나 이○태는 없었다.

며칠 후 이○태의 부인과 어머니가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군서면 도갑리 부근에 가서 그곳에 있는 수많은 시신 속에서 이○태가 입은 조끼의 구멍 꿰맨 자국을 보고 이○태의 시신을 확인하였다.

시신을 수습하여 닭실마을로 가져와 마을 산에 매장하였다. 신청인이 매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태의 묘는 나중에 화순군 춘양면으로 이장되었다. 이○태의 부인과 어머니는 이○태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인근 마을주민으로부터 1951. 1. 26.(음력 12. 19.)에 총소리가 났다는 말을 들어서 이○태의 제사를 음력 12. 18.에 지냈다.

신청서와 함께 제출된 진술서(진술인 정○○, 1933년생)에 따르면, 이○태와 같은 마을에 거주했던 정○○은 이○태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하였고, 이후 이○태의 부인과 가족들이 군서면에서 이○태의 시신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2)

제적등본에는 이○태가 ‘1951. 1. 10. 본적지에서 사망(1954. 8. 10. 신고)’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고, 족보에는 ‘경인(庚寅) 12월 20일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3)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이○태의 시신이 군서면 도갑리 부근에서 이○태의 부인과 어머니에 의해 수습된 점, (2) 이○태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신청인 이○용이 목격한 점, (3) 영암경찰서에 감금된 이○태에게 밥을 가져다주고, 이후 이○태의 시신을 직접 수습한 어머니로부터 관련 내용을 전해 들은 신청인 이○용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4) 영암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들이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된 사건의 발생일이 1951. 1. 25.(음력 1950. 12. 18.)인 점, (5) 신청인이 진술한 이○태의 시신 수습 장소인 군서면 도갑리가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 옆에 위치해 있는 점, (6) 이○태의 제삿날(음력 12. 18.), 족보상 사망일(1950. 12. 20.), 제적등본상 사망일(1951. 1. 10.)이 각각 상이하나 실제 희생일인 1951. 1. 25.(음력 1950. 12. 18.)과 근접한 일자인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이○태는 영암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다가 1951. 1. 25.(음력 1950. 12. 18.)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신청인 이○임 진술조서(2022. 9. 22.) 신청인은 정○채의 아들 정○○의 부인으로, 정○○은 2020년에 사망하였다.
2) 진술서는 2019. 4. 1. 법무법인 법가 사무소에서 작성되었다. 진술인 정○○은 2020년에 사망하였다.
3) 신청인이 가지고 있는 족보는 전주이씨양원군파 족보인데, 언젠가 족보가 비에 젖어 표지가 없어져버려 족보의 제목을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되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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