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짓던 자리에서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5) #10
이민정 기자입력 : 2026. 09. 11(금) 10:18

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진실규명대상자 이○범(2다-2417-65, 신청인 이○행)
진실규명대상자 이○범(李○範, 이명 이○범, 족보명 이○범, 남, 1912년생, 농사)은 1950. 10. 6.(음력 8. 25.), 덕진면 영보리 내동마을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이○행(1957년생, 손자)의 진술에 따르면, 이○범은 덕진면 영보리 355번지 내동마을에 거주하였고, 1950년 가을, 덕진면 영보리 뒷산을 넘어 금정면으로 피난 가던 중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함평이씨 친척들이 이○범의 시신을 수습하여 덕진면 영보리 산42번지에 매장하였다. 이○범의 제사를 예전에는 따로 지냈지만 현재는 집안 합동제사로 음력 1월에 지낸다.
참고인 정○○(1938년생, 이웃)의 진술에 따르면, 이○행이 경찰에게 희생된 날은 음력 8. 25.(양력 10. 6.)로, 참고인의 아버지의 생일이었다. 그날, 경찰이 빨치산을 잡는다고 총을 쏘면서 덕진면 영보리로 오자, 영보리 내동마을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 와중에 경찰이 쏜 총에 맞아 희생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1명이 이○범이었다. 참고인은 그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날이 음력 8월 25일로, 아버지의 생일이라 내가 이 날짜를 잊을 수가 없다. 이날 아버지 생일이라고 아침에 풋밤을 까서 찰밥을 했는데, 갑자기 영암 쪽에서 경찰이 총을 쏘면서 덕진면으로 오니, 영보리, 운암리, 노송리 사람들이 마을 뒷산인 쇠금재, 독가재, 여운재로 흩어져 피난을 갔다. 그날이 이 일대 마을에서 처음으로 피난 나간 날이다. 우리 가족도 찰밥을 싸서 집에서 가까운 독가재로 갔는데, 그날 독가재 쪽으로 간 사람들은 안 죽었다. 쇠금재 쪽으로 간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그중 한 명이 이○범이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집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그때는 경찰이 총 쏘면서 오니까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금정면 쪽으로 갔다. 다른 지역은 어땠는지 모르는데, 덕진면은 그날부터 경찰이 마을에 온다 그러면 금정면 쪽으로 피난을 나갔고, 그해 가을과 겨울, 다음 해 봄까지 그렇게 살았다.
제적등본에는 이○범이 ‘1957. 7. 24. 본적지에서 사망(1957. 7. 27. 신고)’한 것으로, 족보에는 ‘경인(庚寅) 10월 10일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1)
현재는 이○범의 제사를 집안 합동으로 지내 이○범의 제삿날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제적등본 및 족보상 사망일도 서로 상이하나, 참고인 정○○의 진술을 통해 이○범의 희생일이 1950. 10. 6.(음력 8. 25.)로 확인되었다. 1950. 10. 6.은 영암군 영암면이 수복된 날로, 경찰은 영암면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영암면과 인접한 덕진면도 거쳐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이○범의 시신이 덕진면 영보리 내동마을 뒷산에서 수습된 점, (2) 참고인 정○○이 자신의 아버지의 생일(음력 8. 25.)에 경찰을 피해 영보리 주민들이 피난을 나갔고, 그 과정에서 이○범이 희생되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한 점, (3) 이○범이 희생된 날이 영암면이 경찰에 수복된 날인 점, (4) 족보에 기재된 사망일(1950. 10. 10.)이 실제 사망일의 음력 날짜(1950. 8. 25.)과 1달여 차이가 나지만 1950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이○범은 1950. 10. 6.(음력 8. 25.) 덕진면 영보리에 들어온 경찰을 피해 덕진면 영보리 내동마을 뒷산으로 피신하다가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진실규명대상자 정○은, 양○덕(2다-2124-30, 신청인 정○호)
진실규명대상자 정○은(鄭○殷, 남, 1897년생, 농사), 정○은의 부인 양○덕(梁○德, 여, 1905년생, 가사)은 1950. 12. 2.(음력 10. 23.)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 자택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정○호(1955년생, 정○은・양○덕의 손자)의 진술에 따르면, 정○은과 양○덕은 덕진면 노송리 282번지 송내마을에서 딸들과 거주하였고, 정○은의 아들(신청인의 아버지)은 금융조합에 근무하며 신북면에 거주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좌익이 정○은의 아들을 찾으러 정○은의 집에 여러 번 찾아오곤 했고, 그때마다 정○은은 좌익에게 밥을 해주고 돌려보냈다.
1950. 12. 2.(음력 10. 23.), 정○은과 양○덕은 집에 찾아온 경찰에 의해 집 마당에서 몽둥이로 구타당한 후 총살되었다. 함께 살던 정○은의 딸들은 경찰의 지시에 따라 집 밖으로 나가 있었고, 얼마 후 총소리를 들었다. 정○은의 딸들은 무서워서 그날은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음날 집에 가서 정○은, 양○덕의 시신을 확인하였는데, 얼굴과 눈 주위에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고 가슴에 총상이 있었다. 마을주민들이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여 덕진면 영등리와 노송리 송내마을 중간에 있는 솔밭에 매장하였다. 나중에 금정면 연보리 산 192~3번지로 이장되었다. 제삿날은 음력 10. 22.이다.
참고인 신○범(1937년생, 이웃), 참고인 최○대(1936년생, 이웃)의 진술에 따르면, 정○은과 그 부인 양씨는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 주민으로, 경찰이 좌익을 찾는다고 돌아다니던 시절에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시신은 수습되었다.2)
제적등본에는 정○은이 ‘1966. 5. 14. 본적지에서 사망(1966. 5. 19. 신고)’, 양○덕이 ‘1961. 8. 31. 본적지에서 사망(1961. 9. 1. 신고)’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정○은과 양○덕의 시신이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 자택에서 수습된 점, (2) 정○은과 양○덕의 제삿날이 희생 전날인 음력 10. 22.인 점, (3) 정○은과 양○덕이 경찰에 의해 총살되는 소리를 들었고, 두 사람의 시신을 목격한 정○은의 딸들(신청인의 고모)로부터 관련 내용을 전해 들은 신청인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4) 정○은과 양○덕의 희생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참고인 신○범과 최○대의 진술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정○은과 양○덕은 인민군 점령기 때 좌익에게 밥을 해준 적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1950. 12. 2.(음력 10. 23.)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 자택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함평이씨현령공파보(咸平李氏縣令公派譜)』, 192쪽
2) 신청인 신○범 진술조서(2021. 12. 24.), 신청인 최○대 진술조서(2021. 12. 24.) 신○범은 2다-1129-29 사건의 신청인, 최○대는 2다-4976 등 사건의 신청인이다.




